2009년 일본열도를 휩쓸었던 소설/영화가 있다. 바로 [고백]. 딱히 그래서 읽은 건 아니다. 출근 길에 책이라도 읽어볼까 싶은 마음으로 집어들었던 것. 역시 우연의 찰나였다. 추천받은 적도 있고 두께도 얇고 편집도 빽빽하지 않은게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으리라. 왠지 따뜻함을 줄 것 같기도 하고. 예상은 첫장부터 빗나갔지만 읽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은 강했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로 구분되어 있지만 추리로 포장된 '인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것도 인간의 저 밑바닥에 관한.
뭔가를 보고 나서 '서늘하다'라는 느낌을 받은 적은 오랜만이다. 아마도 카프카의 [변신]을 보고 난 후였던 것 같다. 아니 '서늘하다'라는 말보다는 '불편하다'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니 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할테니. 그리고 그냥 불편한게 아니라 아주 불편하여 못본척 하고 싶은 그런 불편함이다.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렸던 건, 그 느낌이 비슷한 탓도 있지만 이야기 또한 비슷하다. 둘다 '가족'이 이야기의 중심 단위가 되며 가족 구성원을 '개인' 아니 하나의 '개체'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렇게 따지자면 그녀의 다른 소설 [야행관람차]가 더 닮아있는 것 같다. 읽고 난 후의 감흥도 매우 유사하다. '서늘함' 그리고 이어져 오는 '불편함'. 어디다 갖다 대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카프카가 계속 떠올랐다. 그 소설을 읽었을 때의 그 충격이...
이 소설들이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다. 우선 일본에서 추리소설이 하나의 장르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 이야기 몰입을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점도 있겠지만, 아마도 그녀가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에 좀 더 부합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의 소설은 범행과정을 추적해나가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소설을 이루는 핵심은 인물이다. 인물 하나하나의 감정, 뒤틀림, 그렇게 된 배경과 맥락. 마치 이글대는 용암을 간신히 견디고 있는 휴화산처럼.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안으로는 뒤틀려있는 그 용암의 뿌리를 추적하는 것이 범행의 추적보다 더 집요하다. 그녀의 소설이 한 사건을 두고 각 인물의 관점을 차용하고 있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범인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범인은 처음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다. 중요한 건 왜 범죄가 발생하는가이다. 인간의 폭력성을 증폭시키는 자극은 무엇인가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 자극은 어디서부터 오는가이다. 참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래서 밝혀지는 가족과 인간의 모습이란 참혹하기 그지없다. 소설의 주제의식을 위해 다소 인물의 성격을 과장되게 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이기심, 탐욕, 불안, 폭력의 증세는 극단적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과장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묻혀져 있던 걸 밖으로 드러냈을 뿐, 과장은 아니다. 누구나 대면하기엔 천박한 이기심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 뒤틀림도 있다. 다만 외면할 뿐.
인생과 관계를 망치는 감정의 밑자락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두려움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다시 의심을 불러일으켜 미움, 분노, 폭력.... 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낳는다. 인간이란 나약하여 한번 시작된 두려움은 좀처럼 잠재우기가 어렵다. 두려움을 다스리려면 사랑과 믿음이 필요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사랑과 믿음은 '순진함'이란 비아냥으로 치부되고 만다. 두려움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기제는 사방에 널렸다. 옆집 이웃의 시선부터 신문기사 제목까지. 매일매일 접하는 모든 것이 두려움을 부추긴다. 결국에 그 두려움은 내 안에 내재되어 스스로를 두려움에 가둔 채, 고통에 빠져 신음하고 분노한다. 안타깝게도, 실로 안타깝게도 이 과정은 가족 구성원간에도 반복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두려움과 고통의 존재가 되는, 그래서 집은 고향이 아닌 지옥이 된다. 마찬가지로 이웃도 지옥, 학교도 지옥, 직장도 지옥.... 도망갈 곳이 없는 인간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선택하는 건 하나다. 파괴. 모든 것을 파괴한다. 나도 너도...
평범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 이상한 곳에서 무리해서 살면 점점 발밑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느끼게 돼. 힘껏 버티지 않으면 굴러 떨어지고 말아. 하지만 그렇게 의식하면 할수록 언덕의 경사는 점점 가팔라져... 준코 아주머니는 이미 한계였던 게 아닐까? - [야행관람차], p.314
현대사회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지옥을 떠앉고 살아간다. 그것은 공유되고 공감될 수 없는 지옥이다. 모두가 비슷한 걸 느끼지만 공감할 수는 없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더 이상 다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자신만을 감당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각자 '개체'가 되어간다.
창문만 닫으면 바깥 소리는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 집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 [야행관람차], p.37
하지만 그렇게 개체로 있어도 내려놓을 수 없는 지옥이 곧 '가족'이 된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그렇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만 그러한가?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현대사회는 지옥을 떠앉고 사는 수 많은 개체들과 개체들간의 싸움이다. 어디서 많이 들은 말이다. 누가 말했던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되는 혼돈을 막기위하여 사회는 일종의 계약을 이루어 나간다고 말한다. 법이란게 아마도 그 대표적인 예겠지. 하지만, 작가는 법이 해줄 수 없는 심판에 대해 얘기한다. [고백]에서도 [야행관람차]에서도 법의 심판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법이 아닌 심판이 필요한지에 대해 굳이 길게 역설하는 것을 보면, 이 혼돈을 막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라는 고민이 많이 있었겠다 싶다.
가족 안에서 일어난 사건에 타인의 판결은 필요 없어. 우리 가족만 사실을 알고 있으면 돼. - [야행관람차], p.326
곱씹어보자면 작가는 현대사회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아니 '개체들에 대한 개체들의 투쟁'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 개체들의 분노는 갈 곳을 잃어 누수되듯 불특정 다수의 개체들에게 쏟아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체들간의 투쟁을 제어해 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법? 경찰? 정치?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믿음이다. 모두가 비아냥거리는 그것. 그것이 사라지면? 남는 건 개체들과 개체들간의 투쟁, 그로 인한 분노의 홍수다. 우리는 연예인 마녀사냥을 통해서, 중고등학교의 집단 왕따를 통해서, 이러한 현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노의 결과들은 또한 분노의 대상이 되어 분노를 낳는다. '심판'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살인자를 벌하려는 다른 인간들(마을주민, 학급동료)의 폭력은 그저 또 다른 분노일 뿐이다. 각 개체들이 떠앉고 있는 지옥의 불구덩에서 누수되어 나온 용암같은.
일본은 그런 거대한 개체간 지옥의 투쟁으로 피폐된 사회를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경험한 듯 하다. (대한민국은 지금이 그 정점에 와있는 듯 하다. 아닌가, 더 분노의 산을 올라야 하는가...?) 그리고 그 극단의 끝에서 '자아성찰'이 화두로 떠오른게 아닐까. 최근 일본의 영화, 소설들을 보면 인간 내면에 대한 성찰이나 관계를 통한 치유를 주제로 삼는 경우를 많이 본다. 어쩌면 이런 성찰이 혁명의 시발점이 되는 것은 아닐까? 순진하게도 그런 혁명을 기대해 본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전혀 달리 봐야 할 것이다. 인간성이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비상 브레이크를 잡는 일이 혁명일지도 모른다. -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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