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야할 책들의 목록이 머리속에 차면, 뿌듯한 마음으로 교보문고를 찾는다. 원하는 책을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쌓아가다가 김영하의 신간을 소개하는 광고를 보았다. 발간기념 할인에 친필 사인까지 담아서라니 안 살 이유가 없다. 배달된 책은 꽤 두꺼웠다. 화려하고 밝은 표지 일러스트는 아마도 이우일의 솜씨이리라. 어디선가 얼핏 읽었던 소개글에 따르면 인터넷 세대 성장소설이라니, 기대 또한 더 크다. 여러모로 학생들을 상대적으로 많이 접하는 상황에 있는 나인지라, 취업난의 압박에 시달리는 요즘 대학생들의 고초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더욱 그렇다.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요즘얘들은..."이라는 서두로 시작하는 기성세대의 삐딱한 시선의 날을 세워 그들을 분석하려 들었으며, 가치판단이란걸 할 줄 모르는 무개념의 이기주의자들로 몰아세우기도 하였다. 가끔은 '그게 그들의 잘못은 아니야'라며 동정어린 말 한마디로 나의 우월감을 확인하려 들기도 했었다.
사실, 정말로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요즘의 세대는 (어쩌면 내가 경험한 주변환경이 특이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경쟁력'이라는 주변의 째찍질에 익숙했으며, 그것이 가져다줄 안락함에 대해서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우리의 눈에서나 그들은 '영악한' 아이들이지, 영악하지 않았을 때 그들이 겪는 낭패감을 생각했을 때는 그렇게 핀잔으로 넘길 일만은 아니다. 우리가 무섭다고 얘기하는 그들의 성공과 돈에 대한 욕심의 뒷면에는 실패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을 터이며, 이를 완충해 주는 그들만의 신념이나 문화를 그들은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괴물'로 인식하지 못하며 그래서 그것이 강요하는 욕망의 재생산 체제에 쉽게 휘말려들고 마는 요즘 친구들은, 그들의 방황과 고통은 어떠할까. 한국사회는 새마을 운동과 독재정권 - 형식적 민주주의와 문민정부 - 신자유주의와 IMF를 겪으면서 정말이지 양적, 질적으로 환골탈퇴하는 변화를 거쳤으며, 사회의 물질적 부는 축적되어 생활은 윤택해져가는 듯 하여, '요즘 얘들은...' 운운하는 말이 정말 단지 기성세대의 눈높이 때문만은 아닐만큼 달라져갔으나, 그 와중에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구별해 내는 눈은 필요하다. 아마도 김영하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달라져가는 시대, 더 이상 거대담론이나 가치판단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시대, 현실보다 가상이 더 현실 같은 시대, 끊임없는 경쟁과 욕망만이 개인의 유일한 삶의 원동력이 되는 시대에,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자본주의가 맨 얼굴로 우리를 마주하는 이러한 시대에.. 성장이란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우리가 갇혀있는 세계가 얼마나 무서운가가 깨달아지는 장면(그것도 여자친구의 말에 의해서)에서, '요즘 얘들'이 처한 가혹한 현실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일말의 쉼도 허락하지 않는, 누구를 위한 것일지 모를 째찍질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 째찍질은 퀴즈쇼와 같은 '회사'를 통해 평생 우리에게 계속 자행될게다.

"뭐랄까. 인생에는 그런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뭔가가 있는 것 같아.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런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거지. ... 인간이 그런 일간지 경제면 같은 세계에만 매몰되서 산다는 건,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는 건, 너무 허망한 거 같아"
"오빠가 아직 배가 부르구나. 매몰되긴 뭐가 매몰돼? 그게 전부야. 그 너머엔 아무것도 없어. 꿈 깨. ... 오빠는 아무래도 안되겠어. 뭐랄까, 뼈속 깊이 게으름이 배어 있다고나 할까. 오빠는 이러니저러니 멋진 말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실은 그냥 놀고 싶은 거야. 세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서 유유자적하며 살려는 거지. 안 그래?"

소름이 돋을만큼 맞는(현실적인) 말이다. 주인공 여자친구의 얘기는. 그래 맞아. 난 그냥 놀고 싶은 거다. 유유자적 그렇게. 그것이 어찌 단지 '게으름'이겠는가. 인생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요즘 아이'의 성장 욕구를 단지 '한신함'과 '게으름'으로 치부하는 사회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라는 곳은.

성장소설이라지만, 어찌나 내가 처한 현실에 비슷하던지. 퀴즈로 운영되는 '회사'라는 곳은 정말 그야말로 우리들이 다니고 있는 '회사'의 모습이다. 현대사회의 회사가 무서운 건  '회사'가 곧 우리고 우리가 곧 '회사'이며, '회사'의 부분집합도 '회사'라는데 있다. 우리는 회사를 다니며 돈과 권력의 욕망을 쫓는 개의 모습에 충실해져 간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찾고자 한다.
얼마 전 회사내에 실적 평가가 있었다. 평상시에는 서로 웃으면서 예의를 갖추던 인간들이 일은 뒷전에 두고 바삐들 움직인다. 그들의 눈에서 난 두려움과 탐욕을 본다. 한달 전쯤인가부터 상사들이 내 눈치를 보며 극진하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본부 실적이 좋지 않아 누군가는 팀 내에서 C를 받아야 했다. 그들은 나를 달래는데 정신이 없다. 온갖 이유들이 나에게 C를 부여하는데 붙여졌으며, 오히려 담담한 나를 보더니 이제는 미안하다는 말까지 아끼지 않는다. 그들은 언짢아하거나 화를 냈을 나에 대한 대처방안을 마련했을 터인데, 그렇지 않으니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슨 말이든 해야 했을테고, 갑자기 뜬금없이 '미안하다'는 솔직한 말이 뱉어진게 아닌가 싶다.
순간 나는, 나 또한 저렇게 될 것이 두려웠다. 마치, '들어온 방향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방 깊숙한 곳에서 퍼덕거리며 지그재그로 날아다니다가 마침내 벽에 제 머리를 강하게 부딪혀' 죽는 소설속의 직박구리처럼.


소설을 마치고 김영하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다 <퀴즈쇼>가 조선일보에 연재된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글쎄 조선일보에 소설을 연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소설가를 비난한다는 건 가혹한 처사일지도 모르겠다. 조선일보도 소설가에겐 단지 자신의 글을 연재할 수 있는 독자층이 두터운 채널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클래지콰이의 보컬 '호란'이 김영하의 열성 팬이라 그를 인터뷰하는 동영상도 보았다.
왠지 씁쓸했다. 내가 뭐 그리 대단할 게 있는 사람이겠냐만. 그리고 소설가로서 그의 성공과 인기에 박수를 쳐줘야 할 일이겠지만.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가 진중권과 김규항의 소식을 접하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요즘의 나에겐 똘아이들의 비난에 시달리며 변변한 팬 까페도 하나 없는 김규항보다는, 클래지콰이의 호란이 좋아한다는 김영하가 더 어울릴 거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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