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비해 어리게 산다는 건,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달리 말해 '젊게 산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이 값을 못한다'라고 할 수도 있고 '패기가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철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젊게 사는 건 좋다. 패기가 있는 것도 좋겠지. 나이 값을 좀 못해도 좋다. 철이 좀 없어도 그건 오히려 순수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다. 결국 나이에 비해 어리게 산다는 건 여러모로 긍정적이지 않나 싶다. 그리고 적어도 그건  비난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리게 산다는 것과 미성숙하다는 건 좀 다른 얘기가 아닐까 싶다. 논리적으로야 '어리다=덜 자랐다=덜 성숙하다' 정도로 같은 의미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어리게 사는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리다'라는 건 다소 모호하고 포괄적인 말이라 여러 종류의 사람을 지칭할 수 있지만(가령, 외모가 어린 사람, 취향이 어린 사람 등), 미성숙하다는 건 성장하지 못한 자아의 심리적 측면을 가리키는 말로써 어린 사람 중에서도 비교적 구체적인 유형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자아 성장이 청소년 또는 어린이 수준에서 멈춘 사람들이 있다. 겉으로는 어른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생각하는 방식이나 느끼는 감정, 행동에 대한 판단 등이 어린아이의 심리를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사람. 예를 들어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만 행동한다거나,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여과 없이 표출한다거나 하는.


그렇다면,  어린아이 같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린아이의 자아는 어떤 심리적인 상태에 있는 것일까? 어린아이에게 세상은 온전히 자신만의 세상이다. 그러니까 세상살이의 복잡함, 피곤함 따위는 알지 못하고 그저 즐기기 위한 무대일 뿐이다. 좀 더 심리적으로 얘기한다면 욕구를 실현하는 곳이랄까. 쾌락을 취할 수 있는 원천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어린아이란 한 마디로 ‘욕심쟁이’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자신의 욕심에 충실하다는 건 사실 나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인간에게 내재된 본능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어린아이 같은 욕심이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된다면, 좀 더 정확히 말해 자신의 욕심을 다루고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다면 그건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동물과 달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와 주변 환경의 철저한 보호 아래 성장하기 때문에, 유아에게 세상이란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할 전쟁터라기 보다는 신기하고 배울게 많은 학교와도 같다. 배가 고파서 울면 먹을 것이 입으로 들어오고, 뭔가 신기해서 손을 내밀면 그것이 손에 쥐어진다. 즉 자신의 욕심과 쾌락이란 게 경쟁과 투쟁의 과정이 아닌 그저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알림 또는 요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채워지고 해소된다. 본래 욕심은 욕심을 부르기 마련이라, 따라서  어린아이의 욕심은 끝도 없이 쉽게 자라난다. (역시 그게 뭐 나쁜 일은 아니다.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쉽게 채우는데 익숙해지면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주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면 안 되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아니 오히려 그런 건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누구나 언제까지  어린아이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부터 더 이상 부모는 아이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때론 거절을 당하기도 하고 때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 무언가를 얻는 경험에서 얻지 못하는 경험이 점점 더 늘어날수록  어린아이는 원하는 걸 좀 더 쉽게, 많이 얻기 위해 부모와의 교섭을 시도한다. 교섭은 애교에서부터 땡깡과 눈물, 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어린아이는 더 이상 세상이란 게 자신의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며, 비로소 세상과 투쟁하는 힘겨운 여정에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이 기나긴 여정이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로 유명한 정신분석 전문의 김혜남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란 이런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세상은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인다는 어린 시절의 전지전능함을 포기해 가는 과정이다. ... 또 어떤 잘못도 용서받고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도 누군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어릴 적의 기대를 포기하는 과정이다.

– 김혜남, [어른으로 산다는 것]


그렇다. 슬프게도 어른이 되어 간다는 건, 내가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다는 것,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 나가는 것이고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기대를 포기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세상이란 나 뿐만이 아닌 여러 사람이 동시에 살아가는 아주 복잡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되고 그 가운데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를 배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미성숙한 어른이란 바로 이런 힘겨운 투쟁의 과정을 거치지 못해 여전히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자신에 대한, 세상에 대한 욕심과 기대를 좀처럼 포기할 줄 모르고 때론 자신이 좌절되고 거절당할 수 있다는 걸 인정치 못하는 사람이랄까.


한국사회의 물질적 풍요가 급작스럽게 축적되고 생활이 여유로워짐에 따라 이런 미성숙한 어른의 등장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까 과도한 물질적 혜택과 부모의 과잉 보호로 인해 원하는 걸 쉽게 얻을 수 있고 불편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욕심과 쾌락의 좌절을 크게 경험하지 못함으로써 어른이 되기에 필요한 힘겨운 투쟁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미성숙한 어른아이들.


이런 어른아이들의 특징은 아주 단순하다. 그러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심리 상태를 보이는데, 원하는 걸 얻는데 집착하고 포기를 잘 모르며, 그래서 인내가 부족하고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의 분노가 크다. 자신의 쾌락을 해소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물론 뒷전이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자신의 쾌락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그건 진정으로 타인을 위한 마음의 발로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애초에 진정한 관심과 배려가 아니다. 또한 무언가를 선택하고 행동하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여러 변수를 두루 고려하는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내가 원하는 욕심에만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본능적 욕구에 크게 의존하여 모든 걸 결정한다.


여기에 어른아이들의 특징을 하나 더 더하자면, 바로 공감능력의 결여다. 사람은 타인과 대화하고 관계하면서 성장한다. 여기서 관계라 함은 상호 간에 오고 감을 의미한다. 대화도 그렇고 감정도 그렇고 감각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런 오고 감의 와중에는 항상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갈등도 있고 싸움도 있고 그래서 상처도 뒤따르기 마련이다. 어찌 보면 타인과 관계하는 과정에는 기쁨보다는 불편함, 어려움, 아픔,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더 많이 따를지도 모르겠다. 특히 어린 시절에는 더더욱. 왜냐하면 어린 시절에는 내 생각과 감정에만 집중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렇기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 하는 의지가 강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타인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아주 어린 유아기 시절이야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고  대신해주기 때문에 나의 욕심을 해결하기 위해 타인과 교섭하고 타협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 없다. 하지만 사회 생활이 시작되고 부모님 이외의 타인과 관계하며 원하는 것을 쟁취해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특히 타인과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상황이 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그러다 보면 분노와 싸움으로 관계가 망쳐지는 일이 다반사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의 과정이 자신에게  손해일뿐더러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상처라도 받게 되는 경우에는 그로 인해 많은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타인과의 나눔, 배려를 통해 얻는 공감의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지 또한 배우게 되리라.


애초에 인간에게는 자신의 욕심을 해소하려는 이기적인 본능만이 아닌 타인과의 나눔을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하는 이타적인 본능도 같이 갖고 있기 마련이다. 다만 어릴 적부터 어떤 본능이 더 자극되고 더 활성화되어 익숙해져 가는가에 따라 다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선설, 성악설 같은 개념은 다 극단의 이론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그 이전에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저 본능에 충실하여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할 뿐. 그래서 결과적으론 때론 선하기도 하고 때론 악하기도 한 것이다. 자라난 환경에 따라 주로 선할 때가 많은 사람과 주로 악할 때가 많은 사람이 나뉜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부모의 과도한 보호 아래 자라는 아이들은 역시 타인과의 갈등, 상처의 과정 또한 겪지 않는다. 타인과의 갈등이 있을 때는 그저 부모에게 말하면 어떠한 노력과 투쟁의 과정도 없이 아주 간단하게 해소가 된다. 이 과정에서는 타인과의 나눔을 통해 얻는 기쁨 또한 학습할 기회마저도 잃게 된다. 때문에 타인의 상황이 어떠한지, 타인이 어떤 마음인지, 타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등 타인에게 관심을 두고 살피거나 배려할 필요를 전혀 못 느끼고 살면서 자란다. 이 과정에서 결국 아이는 공감하는 능력이 발달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어른이 되어서는 공감 능력이 결핍된 나머지 퇴화되기에 이른다.


이는 타인을 해하여 자신의 것을 얻고자 하는 극단적인 이기심, 나아가 윤리적인 부정의 문제와는 다르다. 어찌 보면 그런 윤리적인 문제보다 더욱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다. 그러니까 부정인 줄 알면서도, 타인이  고통받을지 알면서도 자신의 욕심을 휘두르는 것과 내가 원하는 걸 얻는데 있어 타인이 어떤 감정, 어떤 상태가 될 지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공감하지 못하는 건 정말이지 부정을 넘어 무섭고 공포스러운 일이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고 타인을 훼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생각하고 느껴본 적이 없으므로,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뿐이므로 양심의 가책이라는 감정이 일어날 가능성이 애초에 차단되는 것이다. 이것은 판단이 아니라 자동적인 감정체계, 아니 공감능력이 결여된 고장 난 감정체계라는 측면에서 더욱 무서운 일이다. 


이러한 고장난 감정체계가 불행하게도 선천적으로 나타나는 사례가 웃으며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의 경우다. 하지만 이러한 선천적 사례는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쓰기 좋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주변에서 볼 수 없는 아주 드물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장난 감정체계가 어릴 적부터 자란 환경에서 비롯되는 후천적인 사례, 즉 소시오패스의 경우에는 그 보다는 더 흔하게 관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갑자기 고도의 물질적 풍요를 겪은 한국사회의 부모들 (지금의 50~60대 정도)이 심각한 수준의 과잉 보호로 자식들을 키워왔기 때문에 이제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사회로 진출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대표 사례로는 최근 이곳저것에서 사회적으로 큰 무리를 일으키고 있는 재벌 3세들이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을 지는 잠깐만 생각해봐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이 된다. 하지만 그런 ***들 말고도 더 큰 문제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20대의 아이들이다.(물론 아이 같은 30,40대도 포함될 수 있으리라) 나는 지금의 Young Generation을 ‘예의 없다’는 식의 단순히 기성세대 관점에서 그들을 재단하려는 게 아니다. 또한 이런 소시오패스적 경향을 띄는 아이들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들 전체에서는 아주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20년 전에 비하면 두드러지게 늘어나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는 정도의 비중으로 늘어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타인과의 갈등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성장 과정, 이러한 환경이 욕심 많은 어른 아이를 만들어 내는 근원이 된다. 


가령, 예를 들어 보자면 이렇다. 맛있는 과자가 듬뿍 담겨있는 접시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주변에 통제하는 사람은 따로 없다. 유치원쯤 된  어린아이라면 맛있는 걸 먹고 싶어 하는 욕심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데 크게 주저하지 않는다. 즉, 과자를 집어 입 속에 넣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초등학생, 중학생쯤 된다면 이것저것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걸 나 혼자 다 먹어도 되는 걸까’라던가 ‘다른 용도로 씌여질 것은 아닐까‘하는 조심스러운 의심부터 ‘나 혼자 먹으면 다른 친구들이 못 먹겠지’라던가 ‘내 친구 A에게 나눠주면 좋아하겠지’와 같은 기특한 생각까지. 그런 생각이란 그 보다 어린 과거 언젠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여러 번 있었고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채 자란  어린아이라면 초등학생이 되어도 중학생이 되어도 대학생, 사회인이 되어도 그런 생각을 미처 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냥 내 앞에 과자가 있으면 주저 없이 다 먹어 치우고 나서는, 맛난 것을 먹었다는 만족감으로 웃으며 돌아서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고는 더 많은 과자, 다른 과자에 대한 욕심까지 넘보게 되고 욕심은 끝없이 계속 자란다.


나 혼자 다 먹어도 되는 걸까?


결국 욕심쟁이 어린 아이와 다를 바가 없는 어른, 즉 미성숙한 어른인 것이다. 


영화 [Young Adult]는 이런 미성숙한 어른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현대 사회에 이런 어른아이의 문제는 한 번쯤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보게 된 영화라 반갑기 그지 없기도 했지만, 보고 나서 더 반가웠던 건 그 완성도다. 무엇보다 어른아이의 내면 심리를 아주 날카롭게 들추어 내는 그 통찰력에 놀랐다. 자신이 기대하는 자신, 자신이 기대하는 인생, 자신이 기대하는 세상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한창 잘 나가던 오래된 과거-고등학교 시절에서 자아 성장이 멈춰버린 어른아이가  그때 그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야기라는 설정이 벌써부터 어른아이의 심리적 문제의 핵심을 겨냥하고 있다. 그리고 초라해진 현실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비현실감과 과대망상, 강박, 신경질과 분노…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괴물이 되어 버린 한 여성의 이야기.



과장된 캐릭터의 이상한 이야기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미성숙한 어른아이의 내면 심리를 들여다 보기에, 그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기에 이처럼 적절한 이야기와 캐릭터가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가 과연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혹시 내 안에 존재하고 있진 않은 걸까 하는 소스라침.


이토록 훌륭한 감독이 갑자기 어디서 등장한 걸까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면 전작이 [Up in the air]다. 아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전작은 스스로 만든 ‘개인’이라는 감옥에 갇힌 현대인의 고독을 말하는 작품이다. 현대인의 고독을 이렇게 잘 표현하고 통찰한 작품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그 때도 했던 기억이다. 이 정도 되면, ‘현대인’의 불안정한 내면 심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최고의 감독이 아닐까. 이런 감독이 있어서 너무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로.


아, 감독만큼이나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주인공 ‘메이비스’ 역을 맡은 샤를리즈 테론. 설명을 구구절절이 하는  것보다는 영화를 보면 그녀의 연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정말이지 영화 속 그런 여자라고 밖에 생각이 안들 정도로 찌질하게, 자연스럽고 몰입된 연기를 보여준다. 이런 배우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영화를 볼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보석 같은 배우다.


다소 우울하지만, 한 번쯤 봐 두면 좋을 법한, 생각할 꺼리를 많이 던져주는 영양가 있는 영화다. 다만, 이왕이면 머리가 맑을 때,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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